<씝넫野띌몣> 뎵쑍

 

글을 시작하며

국내외에서 발행된 <동의보감>의 고판본에 대해서는 김두종이 <한국의학사: 1966 년, 탐구당> p.323∼325에서 이미 다룬바 있다. 그후 안춘근 손홍렬 등 몇 분이 <동 의보감>의 여러 이판본에 대하여 다루었으나, 김두종의 연구를 기본으로 하여 살을 부친 정도였고, 또한 부분적인 상황의 기술(記述)에 그친 감이 있다. 이는 국내외에서 발행한 <동의보감> 이판본을 다양하게 조사할 기회를 갖지 못하였기 때문이 아닌가 여겨진다.
이제 필자가 1920년 이전에 국내외에서 발간한 <동의보감> 이판본(異版本)에 대하여 다루고자 한다. 그러나 본 론의 앞에서, 먼저 밝히고자 하는 것은 <동의보감>의 이판본에 대한 연구 및 조사는 아직은 완료된 것이 아니므로 향후에도 국내판은 일부 수정될 수 있고 국외판은 다시 증보될 수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 판본고를 기반으로 하여 여러 선배와 동학들의 수정 및 증보를 바란다.

<동의보감>의 편찬 목적

이 책을 편찬한 목적은 오랜 왜란으로 전국토의 대부분(70%)이 황폐하여 병자가 쉽게 치료를 받을 수 없는데다가 의서마저 부족하였고, 의원과 의서는 있으나 새로운 학설이 없을 뿐만 아니라 일부 무식한 의원들이 처방의 뜻을 제대로 해석하지 못해 약을 잘못 쓰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선조는 허준 등에게 새로운 의서의 편찬을 명하였다. 이에 허준은 의원으로서 본분을 다하기 위하여 이 책을 편찬하게 되었다.

<동의보감>의 편찬 과정

<동의보감>은 선조29년(1596) 선조가 태의(太醫) 허준(許浚)에게 완비된 우리나라 의서를 찬집(撰集)할 것을 명하여, 허준은 이 왕명을 받들어 유의(儒醫) 정작(鄭澯:1533∼1603), 태의(太醫) 양예수(楊禮壽: 1520경∼1597), 김응탁(金應鐸), 이명원(李命源), 정예남(鄭禮男) 등과 함께 편찬국을 설치한 후 찬집(撰集)을 시작하여 상당한 진척을 보았으나, 정유재란(丁酉再亂: 1597년)으로 여러 의가(醫家)들이 사방으로 흩어졌기에 편찬 작업이 한때 중단되었다. (참조 <동의보감> 서문)
난(亂)이 끝난 다음 선조가 다시 허준에게 내장방서(內藏方書) 500여권을 내어주어 자료로 하도록 하며 단독으로 편찬을 명하자, 허준은 이에 전력을 다해 10여 년에 걸쳐 집필하여 광해군 2년(1610) 8월 6일에 25권25책으로 완성하였다. 그리고 저술을 완료한지 3년 후인 1613년 12월에 내의원에서 완간(完刊)하였고, 그 이듬해 4월에 오대산과 태백산 사고 등등에 내사된다.
허준은 집필기간 동안인 1608년 3월 17일부터 이듬해 11월 22일 광해군의 방환(放還) 명령이 있기까지 유배 생활을 하며 <동의보감> 저술을 지속한다. 당시 허준의 유배지가 어딘가는 실록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허준에 대한 광해군의 총애와 비호가 있었고, 문외(門外) 출송(黜送)이라 한 것을 보아 일단은 도성(한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으로 형식적으로 유배를 보낸 것이 아닌가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간이 최립(1539∼1612)의 <간이집(簡易集)>에 수록된 유배가 풀린 허준을 송별하며 지은 칠언시 “증송동경태의허양평군환조자의주(贈送同庚大醫許陽平君還朝自義州)”를 참조해 보면 허준은 문외 출송에서 다시 멀리 의주로 유배되어 갔었음이 확인된다.

<동의보감>의 구성:

이 책은 목록이 上·下卷(제1책∼제2책),
내경편(內景篇)이 권1∼권3(제3책∼제6책),
외경편(外景篇)이 권1∼권4(제7책∼제10책),
잡병편(雜病篇)이 권1∼권11(제11책∼제21책),
탕액편(湯液篇)이 권1∼권3(제22책∼제24책),
침구편(鍼灸篇)이 권1(제25책)로 되어 있다.
즉, 이 책은 내경, 외형, 잡병, 탕액, 침구의 5대 강목(綱目)으로 나눈 후, 각강(各綱)이 류(類)에 따라 항(項)을 예기(例記)하였으며 각항(各項)의 류를 다시 목(目)으로 나누고 각 항목(項目)의 다음에는 그 항에 해당하는 병론(病論)과 방론(方論)을 빠짐없이 채록(採錄)하였고, 또 그 출전(出典)을 밝혀 각병증(各病症)에 관한 고금의 치방(治方)을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게 하였고, 곳에 따라서는 속방(俗方)이나 자기의 경험방을 적기도 하였다.
이 책의 내용은 각 병증의 항목을 주로 증상을 중심으로 하여 열거하며, 병항(病項)에 따르는 치방을 출전과 함께 일일이 제시하고 있다. 따라서 많은 여러 가지 의서들을 참고로 할 시간적인 여유를 가지지 못한 현대의 임상의들이 손쉽게 고금 의방을 볼 수 있는 편의성을 준다.
이렇게 <동의보감>은 1212종의 약에 대한 자료와 4497종의 처방을 수록하고 있다.
그리고, 탕액편(湯液篇) 3권3책은 향약명(鄕藥名)이 한글로 637개가 등재되어 있어 국어연구의 귀중한 자료로도 평가되고 있다.
<동의보감>에는 중국의 후한남북조시대(後漢南北朝時代)로부터 수, 당, 송, 원, 명에 이르기까지의 83종에 달하는 중요한 방서(方書)들이 거의 인용되었으며, 특히 우리나라의 방서로는 세종조의 <의방류취(醫方類聚)>와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 그리고 선조조에 양예수 등이 편저한 <의림촬요(醫林撮要)> 등이 채용되어 있다. 따라서 <동의보감> 저술에 모두 86종의 방서를 사용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방서의 사용 이외에 가장 중요한 것은 당시 내의원에 소속된 의원들의 경험도 참고되었다
는 사실이다.
<동의보감>을 위시한 허준의 여러 저서를 보면, 그는 약제이외에 침구학, 병리학, 산부인과, 전염병 방제 등등에도 깊은 관심이 있었던 조선시대 최고의 명의(名醫)이자 과학자이다.

<동의보감>의 의의:

<동의보감>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의의를 가지고 있다.
첫째, 과거로부터 내려온 당시 의학의 일부 비현실적인 이론 부분을 배격하고 실용성을 중요시하여 과학적 입장에서 당시 의학의 모든 지식을 정리하였다.
둘째, 우리 국토에서 나오는 향약(鄕藥)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그 이용과 보급을 강조하였으며, 이를 위해 향약 중 637개의 이름을 한글로 표기하여 쉽게 이용토록 함으로써 조선의학을 부흥시켰다.
셋째, 86여종이 넘는 많은 국·내외 의서를 참고하여 편찬하였으므로 내용이 풍부하여 시간적 여유가 없는 임상의(臨床醫)에게 매우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다.
넷째, 당시 조선의학의 수준을 중국과 일본에 과시하였다.
다섯째, 허준은 조선의학을 하나의 독립된 의학이라는 의미에서 이 책의 이름을 < 동의보감>이라 명명(命名)하였다(허준이 쓴 ‘집례’ 참조). 그는 중국의학을 북의(北醫)와 남의(南醫)로 나누고 조선의학을 동의(東醫)라 하였는데, 이는 조선이 중국의 동쪽에 있다는 지역적인 이유에서만이 아니라, 조선에서도 독자적으로 의학을 연구·발전시켜 왔으며 조선의학이 중국과 대등한 전통과 수준을 지니고 있음을 주체적으로 내포하고 있는 서명(書名)이다.

<동의보감>의 국내판

필자는 한국고전문화진흥회의 제1회 월례학술발표회에서 “<동의보감>과 구암 허준”에 대하여 발표하면서 국내외의 여러 도서관의 도서목록을 취합(聚合)하여 조선에서 발행한 <동의보감> 목록을 만들어 일단은 아래와 같이 제시한 바 있다.
① 1613년 초간본(을해자체 훈련도감 목활자).
② 1634년 내의원 중각본(초판 복각본). / 북경도서관.
③ 호남관찰영 전주장본. / 소장처 미상.
④ 영남관찰영 대구장본. / 소장처 미상.
⑤ 1718년경 / 대북 국립중앙도서관(2부).
⑥ 기해(1719)중추(中秋) 내의원교정 영영개간. / 고대, 성대, 여승구.
⑦ 1753년(영조29) 영영(嶺營)판. / 소장처 미상.
⑧ 1766년 목판본. / 규장각.
⑨ 갑술(1814년: 순조14) 내의원교정 영영개간본(嶺營改刊本). / 소장처 미상.
⑩ 갑술(1814년: 순조14) 내의원교정 완영중간본(完營重刊本). / 규장각, 장서각, 국립
중앙.
그런데, 전존하는 <동의보감>의 각 판을 조사·비교하면, <동의보감>의 판종은 다소 감소될 수 있으므로, 필자가 보기에 국내판 <동의보감>의 판종은 6종에 미치지 못 할 것 같다. 이를 구체적으로 기술하자면, 위의 목록 가운데 5)와 6)은 동일본일 가능성이 높으며, 완영판인 3)과 10), 그리고 영영판인 4)와 7)·9) 역시 동일본일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필자는 전술한 학술발표회에서 “<동의보감>과 구암 허준”에 대하여 발표하면서 “국내판 <동의보감>의 판종에 대한 조사와 규명이 이루어지면 정확한 것을 알겠지만 국내판 <동의보감>의 판종은 10종에 미치지 못 할 것이며, 최소 6종의 판으로 확정될 가능성도 있다.”고 일단 제시한 바 있다.
이제 <동의보감> 국내 판본론을 필자의 관점대로 다시금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1) 1613년 초간본(을해자체 훈련도감 목활자) / 장서각(이왕가 구장본), 규장각(규1933, 태백산 사고 내사본), 국립중앙도서관.
사주쌍변(四周雙邊), 반곽(半郭): 26.6×16.5㎝, 유계(有界), 10행21자, 내향삼엽화문어미(內向三葉花紋魚尾), 주쌍행(註雙行).
※규장각 소장본 “규1933″의 내사기를 보면 “萬曆四十二年二月日 內賜東醫寶鑑一件太白山上”이란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는 태백산 사고에 내사하여 보관했던 책이고, 반면에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보물 제1085호)의 내사기를 보면 “萬曆四十二年二月日 內賜東醫寶鑑一件 五臺山上”이란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는 오대산 사고에 내사하여 보관했던 책이다.
2) 연대미상(17C), 목판본 / 영남대 박물관(낱권 1책).
이 판본은 <동의보감> 초판본의 복각본이므로 판식이 초판본과 같다.
<동의보감> 초판본이 나온 이후 그 보급을 위하여 내의원으로 하여금 교정하게 한 후 완영과 영영에서 목판본 <동의보감>을 만들도록 하였다. 이 <동의보감> 재판본을 살펴보면 간기(刊記)는 없으나, 이는 초판본의 복각본이라는 사실을 쉬 알 수가 있다. <동의보감>의 조선판본은 모두가 훈련도감 목활자본의 복각 및 번각본이다.
물론 복각하는 과정에서 얼마만큼 원판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느냐가 하나의 관건이 되기도 한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치룬 직후 <동의보감> 목판본의 제작은 매우 큰 국가적인 사업이었다. 그런데, 실제로 어느 시기에 만든 판목인지는 알수가 없지만, 정·순조 시대의 인물 서유구(徐有埍: 1764∼1845)의 저서 <누판고(鏤板考: 7권3책)>에는 <동 의보감>의 판목이 호남관찰영(전주장본)과 영남관찰영(대구장본)에 소장되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3) 기해(1719) 중추(中秋) 내의원교정 영영 개간. / 고대, 성대, 여승구.
사주쌍변(四周雙邊), 반곽(半郭): 22.7×16.5㎝, 유계(有界), 10행21자, 내향이엽화문어미(內向二葉花紋魚尾), 주쌍행(註雙行).
현존하는 <동의보감> 가운데 “기해년 중추 내위원 교정 영영 개간”이라 한 책이 있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기해는 1719년으로 판단된다. 한편, 대북 국립중앙도서관 도서목록에는 1718년경본 <동의보감>이 두 질 소장되어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도서목록에 의하면 그 책은 간기가 없는데, 표지 뒷면에 배접되어 있는 공문서가 1718년 것이라고 하여, 1718년경으로 본 것이다. 따라서 대북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은 기해(1719) 중추(中秋) 내의원교정 영영개간본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4-1) 갑술 내의원교정 영영개간본(嶺營改刊本). / 소장처 미상.
판식미상.
갑술 내의원교정 영영개간본은 별도의 판목을 새긴것이라기 보다는 기해 중추 내의 원교정 영영개간본을 일부 보각하여 인쇄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별도의 간기가 없는 것 같다.
4-2) 갑술 내의원교정 완영중간본(完營重刊本). / 규장각(규447), 장서각, 국립중앙.
사주쌍변(四周雙邊), 반곽(半郭): 23.6×16.8㎝., 유계(有界), 10행21자, 내향삼엽화문어미(內向三葉花紋魚尾). 을해자체 훈련도감 목활자본의 복각본을 재복각한 판으로 보인다.
이 책에 기록된 갑술년은 언제인가? 이를 살펴보자. 우선 여기에서 말하는 갑술은 1874년 이전일 것이다. <동의보감> 초판본이 나온 이후로 1874년 이전까지의 갑술년은 1634·1694·1754·1814년이다. 따라서 김두종은 이 갑술년을 1814년으로 보았다. 그러나 이 갑술년은 1814년이 아니라 1754년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우선, <영조실록>, 영조29년(1753) 9월 23일조를 보면 영의정 김재로가 <동의보감>과 <증보 만병화춘>의 간판(刊板)을 청하므로 영영(嶺營)에서 간판하게 하였다는 기사가 나오는 것을 보면, 1753년 또는 1754년경에 영영에서 <동의보감>을 만든 것이 확실한데, 1754년이 갑술년인 것이므로 갑술 내의원 교정본에서의 갑술년은 1754년일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이다.
한편, 중국 북경도서관에는 1634년 내의원 중각본 <동의보감>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역시 갑술년이므로 북경도서관 소장의 <동의보감>은 실물을 확인해야 정확한 것은 알겠지만, 북경대학교 소장본은 갑술 내의원 교정 완영중간본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런데 갑술 내의원 교정 영영중간본은 아직 실물이 확인된 바가 없는 것을 보면, 1753년 김재로가 청한 영영판 간판은 1719년 판목 가운데 없는 각판(刻板)을 1754년에 보각(補刻)한 것일 수도 있다. 아울러 김재로의 영영판 간판을 청한 것은 1754년에 완영판을 내는 계기를 준 것으로 판단된다. 현재, 확인된 바로는 갑술 내의원교정 기록을 가진 <동의보감>은 완영판이 유일하다.
한편, 현재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 <동의보감> 목판본으로 건륭 31년(1766)의 간기를 가지고 있는 목판본(규11720)이 있다. 필자가 <동의보감>의 국내판 판본을 열거한 위의 목록에서 ⑧번으로 소개한 책이다. 그런데 이 책은 조선판이 아니라 중국판이 <규장각도서 한국본 종합목록>에 올라 있으므로 조선판으로 오인되어 온 것이다. 따라서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국내에서 간행된 <동의보감>으로 확실한 것은 4종이 있는 것으로 정리된다.
기해(1719) 영영판이나 갑술(1754) 완영판은 그 판목을 영영이나 완영에서 아주 잘 관리되었으므로, 그 판목으로 <동의보감>을 수시로 인출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관리(官吏)들이 판목의 사용(인출)을 하나의 축재 수단으로 여겼을 경우 조선시대에 그 인본은 좀체로 얻기가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따라서, <동의보감>은 대개가 부유한 의가(醫家)와 유가(儒家)·세도가(勢道家)들 사이에서 비장(秘藏)되어 내려 왔으므로, <동의보감>은 우리나라 의서(醫書) 가운데 기본서이면서도 가난한 의생(醫生)들 사이에서는 입수가 흔치 않은 그러한 의서였다. 따라서, 1890년에 나온 상해판 < 동의보감>이 국내에 대량 유포된 것은, 당시에 조선판 <동의보감>의 입수가 쉽지 않았다는 사실을 입증하여 준다고도 볼 수가 있다.

<동의보감>의 중국판

<동의보감>의 중국전래시기는 초판본이 발행된 직후로, 중국을 오가는 사행원(使行員) 편을 통하여 전달된 것으로 추정된다. 외교적 차원에서 볼 때 사행원 편을 통한 <동의보감>의 중국 전달은 중국에 조선의 의학수준을 널리 과시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현재, 중국에는 <동의보감> 초판본이 한질 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동의보감> 초판본 이외에도 재판본부터는 상당수가 중국으로 유출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1763년에 중국초판본이 나오기까지 조선판 <동의보감>은 수요가 있었으나 공급량이 없어 상당수 필사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필자에 의하여 1920년도 이전에 나온 <동의보감>의 중국판본이 조사된 것은 모두 18종이었다. 이 작업이 일차 마무리된 후인 2000년 2월 18일에 구암학회의 한대희 회장에게서 <구암학보> 제3·4호를 받게 되었는데, <구암학보> 제3호에는 장문선(연변민족의학연구소)이 쓴 “<동의보감>이 중국의학에 미친 영향”이란 논문이 들어 있었고, 그곳에는 <동의보감> 중국판본에 대한 언급이 있었다. 그런데, 아쉽게도 장문선은 그 논문을 쓰면서 필자와는 달리 <동의보감> 판본에 대한 소장처를 전혀 밝히지 않았다. 그러나 필자가 조사한 것과 장문선이 조사한 것을 대비하여 보면 서로 보충하여야 할 부분이 있어, 우선 필자의 조사를 기본으로 하여 그가 조사한 것 가운데 필자의 조사에서 빠진 것을 보충하여 아래에 제시한 목록을 다시금 만들었다.
아래의 목록은 <동의보감>의 중국판 목록이므로 필사본(1747년 王如尊의 抄錄本 등등)은 포함시키지 않았다.
1) 1763년 벽어당(壁魚堂) 초간본, 목판본 / 소장처 미상.
1766년 본을 보면 1763년 본의 간기가 들어 있어 1766년 본은 1763년 본의 재판임이 입증된다. 그러나 1763년 본은 소장처가 확인되고 있지 않다.
2) 1766년, 능어서 간본(弮魚序 刊本), 목판본(25권25책) / 길림도서관, 규장각. 上下單邊, 左右雙邊, 半郭: 17.8×11.2㎝., 有界, 8행26자, 上黑魚尾.
3) 1796년 영덕당(英德堂)각본, 목판본 / 흑룡강도서관.
4) 1796년 강녕(江寧) 돈화당(敦化堂)각본, 목판본 / 북경대 도서관.
5) 1796년 취성당(聚盛堂)각본, 목판본 / 절강도서관.
6) 1797년 각본 / 소장처 미상.
7) 1821년 경운루(慶雲樓)각본, 목판본 / 소장처 미상.
8) 1831년 자선당(資善堂)각본, 목판본 / 절강도서관.
9) 1831년 부춘당(富春堂)각본, 목판본 / 길림도서관.
10) 1847년 숭순당(崇順堂)각본 / 소장처 미상.
11) 1877년 광동 근문당(近文堂)각본 / 소장처 미상.
12) 1885년 포방각(抱芳閣)각본, 목판본 / 남경도서관.
13) 1889년 소주(蘇州) 강좌서림(江左書林)번각본, 목판본 / 중국의학과학원도서관.
14) 1890년 강소(江蘇) 소엽산방(暬葉山房) 각본, 목판본 / 안휘도서관.
15) 1890년 주요지(朱曜之)각본, 목판본 / 남경도서관, 광동중산도서관.
이 판본은 일본 경도서림 판본을 번각한 것.
16) 1890년 상해(上海) 교경산방(校經山房) 석인, 석판본(15권16책) / 안휘도서관, 남경도서관, 광동중산도서관. 고려대 화산문고.
17) 1890년 상해 금장(金章)도서국 석인, 석판본 / 여승구.
이 판본은 일본 경도서림 판본을 번각한 것.
18) 1890년 상해 천경당서국(千頃堂書局) 인행, 석판본(25권16책)·표제: <繪圖 東 醫寶鑑>, 내제: <訂正 東醫寶鑑> / 관훈고서방.
이 판본은 일본 경도서림 판본을 번각한 것. 그리고, 상해 천경당 판본은
1917년 본도 있는 것 같은데, 아직 실물을 확인하지는 못했다.
19) 1890년 상해 광익서국(廣益書局) 석인, 석판본(25권12책)·표제: <增圖 東醫寶 鑑> / 고대 화산문고.
20) 1908년 상해 소엽산방(暬葉山房) 연인(鉛印)·<개량 동의보감> / 광동중산도서관, 여승구.
이 판본은 일본 경도서림 판본을 다시 개량하고 ‘신증생리해부도설(新增生理解剖圖說)’을 합부하여 출판한 책.
21) 민국초(1912)년 상해 금소서국(錦素書局) 석인(石印), 석판본 / 길림도서관.
22) 1917년 상해 광익서국(廣益書局) 영인 / 길림도서관.
23) 1917년 상해 금장서국(錦章書局) 영인 / 소장처 미상.
위에서 제시한 대로 현재까지 집계된 중국판 <동의보감> 고판(1920년 이전)은 모두 23종이다. 즉, 중국판 <동의보감>의 고판종(古版種)은 조선판보다도 무려 6배나 되는 것이다. 그리고 1917년 이후 1955년까지 몇 종의 <동의보감>이 나왔는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연변민족의학연구소의 장문선은 앞에서 언급한 “<동의보 감>이 중국의학에 미친 영향”에서 1955년 이후에 나온 <동의보감>을 아래와 같이 제시하고 있다.
① 1955년 중국 인민위생출판사 영인본 초판, 완영중간본을 2.500부 영인, 전2책.
② 1959년 대만 동방서점 영인본 초판.
③ 1962년 대만 동방서점 영인본 재판.
④ 1966년 대만 국봉출판사 영인본 초판.
⑤ 1977년 대만 국봉출판사 영인본 재판.
⑥ 1981년 대만 광문서관 영인본 초판, 전3책.
⑦ 1982년 중국 인민위생출판사 영인본 재판, 11.500부 발행. 전1책.
⑧ 1991년 대만 광문서관 영인본 재판.
이상의 1955년 이후 근래 판의 특징은 조선판의 축소 영인본이라는 점이다. 이는 원본을 그대로 영인 할 수 있는 인쇄술이 발달하였고 보편화되었으며, 조선판이 원전이기 때문에 원전보급에 주력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앞서 언급한 1917년판 이후에도 1955년부터 최근까지 최소 8종 이상의 이판이 나왔으므로, 이러한 근래의 것까지 합하면 최소한 중국에서 나온 <동의보감> 이판본은 모두 31종이 훨씬 넘을 것이다. 이제 향후에도 중국판 <동의보감>은 더 발견될 수가 있다. 어쩌면 조선에서보다
도 중국에서 <동의보감>은 더 읽혀지고 활용되어져 왔던 것은 아닐지‥‥‥,

<동의보감>의 일본판

<동의보감> 일본판의 존재에 대하여 처음으로 논 한 분 역시 김두종이다. 그는 < 동의보감>의 일본전래시기를 1662년 3월로 고증하였다. 그것은 <접대사목록초(接待 事目錄抄)>에 <동의보감>과 <의림촬요>를 요청하여 가져갔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현재, 김두종이 처음 일본판으로 제시한 아래의 두 종을 제외하고는 일본판 < 동의보감>이 아직 더 조사된 것이 없다. (참조: 김두종, ①<한국의학사> p.324., ②< 한국의학문화대연표> p.386.)
1) 1724(형보9)년 경도서림(京都書林), 목판본, 곤정등병위(梱煓藤兵衛). / 일본 내각문고. 이 경도서럼 본은 중국으로 건너가 수차에 걸쳐 번각된다.
2) 1799(관정11)년 원원통 훈점 재간본, 목판본, 대판서림(大阪書林).
위의 두 종 이외에 19세기에 나온 <동의보감> 이판본의 존재유무가 조사 안된 것을 보면, 이는 기존판(1799년)을 통한 활발한 보급이 이루어졌고 19세기말에 이르러서는 중국판의 공급이 대량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 아닌가 여겨진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동의보감>의 내용을 일부 발췌한 서적과 그 영향을 받은 여러 종의 서적이 19세기에 출판되기는 하였다.

맺음말

규장각본과 국립중앙도서관본 <동의보감>을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은 <동의보감>을 태백산과 오대산 사고에 보존했다는 사실이다. 물론 태백산과 오대산 사고이외에 다른 사고와 교서관이라든가 홍문관 등등 당시의 모든 중요 관공서에도 비치하였을 것이다. <동의보감>을 사고에까지 보관하였던 사실을 보면, 우리는 광해군이 이 책을 얼마나 중요시했는지 잘 알 수가 있다. 실록이나 사료를 보관하는 사고(史庫)에 책이 내사된다는 것은 영구 보존을 의미하는 것이고, 이는 자신이 왕으로 재위하면서 이룩한 최고의 업적으로 여긴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허준의 <동의보감>은 위에서 제시한 대로 조선판 보다 중국판이 6배나 된다. 그리고 이 책의 중국판은 조선판을 모본으로 하여 만든 판과 일본을 거쳐서 중국으로 전한 일본판을 모본으로 하여 만든 판이 있다. 이 가운데 전자는 조선판의 2세 판으로, 후자는 조선판의 3세 판으로 말 할 수가 있다. 즉, <동의보감>은 조선인이 저술한 최초의 국제적인 베스트셀러로서 예나 지금이나 동양의학의 대표적인 고전이다.
그런데, 1890년 상해판들이 국내에서 상당수 전존하고 있는 것을 보아, 일본으로 전래된 <동의보감>이 정정(訂正)되어 다시 중국으로 전파되었고, 재미있게도 이것이 다시 <동의보감>의 원산국이라 할 수 있는 조선으로 역수입되는 일이 생긴 것이다.
이는 이 책이 조선에서도 비교적 흔한 책이었으면서도 대개가 외부 대출이 안되고 비장(秘藏)되어 있었으므로 흔하지 않았고, 또한 상당히 귀하게 평가되었음을 의미한다. 문제는 조선에서는 <동의보감>이 관판본(官版本)으로 나왔으며,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사가판(私家版) 또는 방각본으로 상업화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근래에 이르기까지 활용성 면에서 무한한 가치를 지닌 <동의보감>의 처방이 우리나라에서는 일찍이 산업화되지 못한 한 원인이 될 수도 있다. 즉, 이제 우리는 조선시대에 < 동의보감>을 판목을 관(官)이 소유하면서 오히려 유포에 걸림돌이 되었음을 생각하고, 이로 인하여 고귀한 처방이 널리 퍼지고 상업화하는데 적극적이질 못하였던 것을 거울삼아 이제는 이러한 현상을 불러 온 정보의 관 독점 현상이 사라져야 할 것같다.
어쨌든 과거로부터 의학정보의 상업화를 시도한 중국은 이 책에 들어 있는 <우황 청심환>을 대량으로 만들어 상품화 시켰으며, 한때 그 약품으로 우리나라를 포함한 세계의 <우황청심환> 시장을 정벌하기까지 하였다. 역시 속담대로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OO이 벌어”온 셈이다. 이제 우리나라의 의약계에서도 <동의보감>을 원용하여 많은 생약을 개발하여야 하겠다.
아울러, 최근에는 <동의보감>의 한글번역본과 독어본과 영문본, 초판 영인본, CD판 등등도 출판되었는데, 우리 국민들의 건강을 위해서라도 <동의보감>의 한글본이나 그 요약본을 곁에 두고 읽는 습관이 우리 국민들에게 붙었으면 한다. (2000. 2)
onekorea@yahoo.com
[출처:http://home.hanmir.com/~herjun/delist01.htm]

 Posted by at 9:31 am